귀가 아닌 마음을 두드려 소통하는 언어재활사 이주현 동문. 들을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사람에게 세상과 통하는 길을 열어 주고 싶다는 그녀의 소망을 들었다. 바쁜 일상을 핑계로 가족 간 대화마저 귀찮게 여기던 이들에게 그녀가 전하는 메시지는 ‘소통’이다.

▶나에겐 항상 사람이 중요했다.

어려서부터 난 자신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더 많아 어려운 처지의 사람을 보며 자주 울었다. 단지 눈물이 많아서라기보다 여러 상황 속에서 사람들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읽어 내고 공감하는 능력이 남달랐다고 할까. 불어불문과에 진학한 것도 불어라는 언어를 이용해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 있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생각에서였다.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된 중요한 순간은 3학년 1학기 개강 첫날, 장병기 지도 교수님 강의 시간에 찾아왔다. “매우 실용적인 학문이며, 언어 장애가 잇는 사람들을 도울 수 있다”는 교수님의 설명, ‘언어병리학’에 관한 얘기였다. 봄 햇살이 따스하던 강의실에서 마치 꿈을 꾸는 듯한 기분으로 ‘이것이 내가 할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강의가 끝나자마자 언어병리학에 대해 조사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에는 관련된 학위 과정이 없었다. 그대로 포기할 수 없었기에 바로 프랑스 유학을 결정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불어를 잘하지도 못하면서 어디서 그런 대담함이 나왔는지 모른다.

▶언어재활사를 향한 실행력

프랑스 대학에서 학위를 받기 위해서는 어학과정을 먼저 밟아야 했기 때문에 불어실력을 늘려가면서 그러나 프랑스에서 언어병리학을 조사하던 중 프랑스 대학에는 단순히 언어병리학과만 있는 것이 아니라 언어재활사와 언어병리학 박사로 커리큘럼이 나뉘어져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졸업까지 6년 이상 걸린다는 사실도 알았다. ‘과연 프랑스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맞는가’에 대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한국에 있는 친구로부터 국내에도 언어병리학 석·박사 과정이 신설되었다는 편지를 받았다. 곧바로 귀국하여 3학기 남은 학부 공부와 언어병리학 석사 진학을 준비하던 그때,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선배들과 커피 한잔 할 시간도 없었지만 이제는 여유롭게 불문과 선배들과 담소를 나누고 싶다. 제가 커피 사겠습니다. 선배님들!

▶너의 마음에 나의 목소리가 닿았을 때

처음 맡게 된 친구는 청력이 완전히 상실된 두 살배기 아이였다. 아이의 어머니가 잘 부탁한다며 문을 닫고 나가자 작디작은 아이를 안고 나는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막막했다. 아이가 마구 울기 시작하는데 어르고 달래면 울음이 잦아들었다가도 다시 울기를 반복해, 아이도 나도 혼비백산이었다. 공부한 이론을 기억하려다가 문득, 아이에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아도 울림이 전달될 것이라는 생각에 아이를 꼭 안고 말을 걸었다. “너를 만나 행복해. 몇 년 뒤 너는 말을 할 거야. 우리는 소통할 거야…” 

그런데 1주일 뒤,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두 번째 만남에서 아이는 똑바로 앉아 나를 응시했고, 내가 제시하는 사물에 계속 관심을 보이며 집중하고 따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만남에서 우는 것 외에는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던 아이에게 나의 진심이 전달되었다는 걸 느끼던 순간, 그 벅찬 감동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지금까지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일을 계속할 수 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나를 찾는 그들이 있어 행복한

이후 꽤 오랫동안 병원, 복지관, 사설 언어치료실 등에서 지내다가 직접 센터를 설립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마지막으로 근무한 보청기 제작 기업의 언어 치료실이었다. 치료 교육을 통해 청각 장애인들을 돕고자 만든 그곳은 운영권이 다른 곳으로 넘어가면서 돈 되는 사업이 아니라는 이유로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맡고 있던 아이 중에는 4살까지 말 한마디 못한, 만난 지 겨우 두 달 된 아이가 있었는데, “또 어디로 가서 선생님을 찾아야 하나...” 하는 아이 어머니의 한숨 섞인 얘기를 듣자니 돈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소통할 수 없다는 현실에 화가 났고, 센터를 만들면 오시겠냐 물으니 어디든 따라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날 퇴근 길 공덕역의 눈앞에 보이는 부동산으로 들어가 그 건물에 있는 사무실을 달라고 했고, 그렇게 일주일 만에 작은 오피스텔로 센터를 개원하게 되었다. 그 후 1년 동안 센터에는 그 아이 한 명만 찾아왔다. 부족한 임대료는 사비로 메웠지만 마음은 늘 행복했다. 그리고 곧, 감사하게도 많은 분이 찾아와 현재 70여 명의 아이들과 함께하고 있다.

▶언어 치료는 마음의 치유부터

언어 치료 전문으로 시작한 센터는 개원 1년 만에 심리 치료 선생님들을 모시고 확장하게 되었다. 언어 장애가 있는 사람은 대부분 소통의 부재로 좌절을 겪게 마련이고 좌절은 곧 분노, 폭력 혹은 위축으로 이어진다. 이런 심리상태를 무시한 채 언어 자극만 주는 일은 의미가 없었다. 현재 센터에는 언어장애 외에도 정서장애, 자폐증, 가족 불화 등 다양한 증상의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찾아오고 있다. 치료 교육의 목표는 장애로 인한 어려움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삶을 더 아름답게 만들겠다는 생각을 심어 주는 것인데, 20여 년 이 일을 하면서 깨달은 바가 있다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는 일은 하고자 하는 동기와 노력의 지속성, 그리고 나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의해 좌우된다는 사실이다.

장애로 인해 마음에 상처를 입은 사람, 더욱이 어린 아이라면 자신의 삶을 위해 노력하고자 하는 동기를 스스로 찾는 것이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다. 먼저 마음을 어루만져 상처를 치유하고 동기를 심어주는 것, 그들을 위해 조금씩 환경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 우리와 같은 언어재활사와 심리재활사의 역할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환경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다. 그동안 바쁘다, 귀찮다, 피곤하다는 핑계로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을 외면한 것은 아닌지, 가족들과 마주 앉아 나누지 못했던 이야기를 나누었으면 한다. 바쁜 우리일수록 서로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져 주는 진정한 소통의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