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길실 개인전 목록

• 기간2016.08.24 - 2016.08.30
• 전시관제 4관
• 작가임길실

열망과 묵상, 임길실의 회화

- 박응주 (미술비평가)

이것으로, 이것만으로 우리는 존재했었다.

그것은 우리의 사망 명부에도
자비로운 거미줄로 뒤덮인 회상 속에도
우리의 빈 방에서 야윈 공증인이 떼는 봉인 밑에도

적혀있지 않은 것

                                                     T. S. 엘리엇, 《황무지》Ⅴ.

 성장 이후, 그의 시대

그의 성장기는 어딘가 서럽다. 아스라이 저 먼 곳. 그러다가도 불쑥 시뻘건 육질의 너무도 현실 같은 것, 허무하고 허무한 것. 누군가 살짝 건드리기만 해줄라치면 펑펑 울음이 쏟아질 듯한…. 그의 상상계를 구성 하는 선과 악의 맥놀이가 귀를 먹먹하게 하던 때…. 존재가 어디엔가로 통하는 문門이 있겠거니… 싶었다. 산과 물이란 사람 얼굴을 닮아 있다고도 했다. 내면內面에 있을까…? 이름 없는 돌조각의 장인들, 그 뭇 삶들을 생각한다. 그리하여 저 단단한 암각화처럼 화석되기. 외면에 있을까…?
열망한다. 그리고 묵상….
모범생다운 조형과 그렇기에 자신 없고 둔탁한 색채의 그 시대의 그림들은 그렇게 감정의 절제와 비탄스 런 관망 사이를 오가는 감정의 기복을 따라 골이 깊이 패인 기록들이다. 그것은 세상이라는 절벽을 마주 한 채 열리지 않은 문을 찾아 주먹으로 두드리는 무모한 패기와 좌절의 여실한 자취로 보인다는 것이다. 그만큼 서럽고 절실하다.
그러나 이는 그림을 형상의 성취 여부로만 판단하는 형식주의 비평의 견지에서라면 무시되기 일쑤인 특 질들일 것이다. 즉 거기서라면 그의 훈련기 그림들은 화면 내의 힘을 집약해 무언가를 발화하는 통일성 으로 이끌지도 못하고 형상들 간에 역동성을 만들어내는 진동의 긴장도 성취하고 있지 못하다는 타박을 들을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는 또한 온당하지 못하다. ‟인류를 보편적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아무도 사 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처럼 인류 보편의 미적 감동을 목표로 하고 있는 형식주의 미학의 텔 로스란 자칫 아무도 감동시키지 못할지도 모르는 것이기도 한 때문이다. 거기엔 분명 오직 작가 자신 홀 로만이 감당할 수밖에 없는 운명적 정념이나 생을 경작해 나가는 매일매일의 신앙(심)-혹은 생의 윤리(심) 과 같은 것이 탈수되기 때문이다.
어쨌든, 새로운 세기의 10여년이 경과하고 있던 근래까지도 여전히 문은 두터웠고, 혼신을 다해 낑낑거 려야 겨우 조금, 아주 조금 열렸다가 그나마 이내 닫히곤 했던 그때로부터 변화는 홀연히 찾아온 듯싶었 다. 그것은 ‘인물’과 ‘자기’를 제재로 취하면서부터, 그의 말로 “인간에게선 들리지 않는 어떤 천상의 소 리”가 ‘경계선’에 존재하더라는 발견 이후였을 것이다.

 경계선

아마, 이전의 산만하고 떠도는 우주의 섭리 같은 것들이 놀랍도록 정렬되어 있다는 것을 느낀 것일 테다. 다사다난한 자연의 그 모든 변화들을 품고 있는 단 하나의 일원론, 어떤 구체적 현실에로의 수렴, 그 모 든 분방한 내용들은 구체적 형식에게로 살짝 길을 비켜서 터주고 있는 채로 한 줄기 빛의 지나감이면 충 분하다는 듯(나의 햇살, 2016) 이 세계를(그는 이전엔 확실히 ‘저편’을 더 선용하는 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편의 세부를, 더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다. 억겁의 무게로 누르는 역사와 자연이 우리를 휘감고 있다할지라도, 한 가냘픈 생명의 탄생과는 비할 수 없는 것일 테다(탄생, 2016). (이 눈의 새로울 것 없는 듯 보이기도 하는, 퇴색될 수 없는 새로움을 어떤 말로 흔쾌하게 찬사하자!).
그는 냄새 맡기 시작한다(건너가는 아이들, 2016). 감각이 열리는 것이다. 그곳엔 유아와 동물에게까지 감각을 투사해 개방해나가는 열려진 창문이 있다. 급기야 비닐 속에서 몸부림치는 자신의 행위극을 그 리고 있는, 그리고 이를 독립된 작품으로 내보이는 또 다른 작품에서 (‘시선’ 1과 ‘시선 2’, 2016) 우리는 지나가는 말로 그가 말했던 바 다소 불우했던 유년 시절의 대역 배우, 페르소나(Persona)를 보고 있다면 무리일까. 역할극의 대역 배우로서의 회한과 조바심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록되어있는 꿈과 열망의 투사 가 뒤범벅된 다 큰 소녀가 거기에 있는 것이다.
이들 작업을 문지방, 경계에서의 어떤 장엄한 의식(儀式)으로 볼 수밖에 없던 이유다. (보이는 보이지 않 는 것, 2016)을 추적해 더 이상 캐묻기를 중단해야 할 명분도 아마 이와 같을 것이다.

 열망과 묵상



그에게 이전의 그림들이 있어 그것이 ‘지옥도’의 비탄의 함성이어서라기 보다는, 비유컨대 여기에서는 하 데스의 지하 세계로부터 슬기 있게 빠져나올 ‘아리아드네의 끈’이 선명하다고 말하는 것은 가능할 듯 하 다. 따라서 우리는 즐거울 것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딘가 이 길로 가면 불 켜진 인가人家가 있을 것 같긴 하다’는 것이다(또 다른 세상, 2016). 그것은 삶의 신비에 대한 예찬이지, 이미 죽음의 사슬이 더 이상 아 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망’이라고 말했지만, 이것이 멀찌감치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견자의 태도로만 보는 조망이 아니라 는 증거를 대라면 필자는 솔직히 자신할 수 없어하게 될 것임을 또한 고백한다. 그것은 영혼과 영혼 사이의 차이와 동질을 표현하고자 하나 아직 적확한 상황을 붙잡지 못한 채 관념적인 암시 이상으로 더 나아가지 는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어느 결에 그의 그림은 조형의 맛에 살짝 빠져들어 가 있는지도 모른다. 그림은 공적인 어떤 지평이 있어야 했다. 그것은 가장 고독한 개인성의 사적 세계이되 단, ‘공적인 사적 정서’일 수밖에 없는 운명인 것이라 말해 볼까.. 즉 예술가란 아무리해도 어떤 존재의 명령을 수행하는 대리인일 수밖에 없다는 것. 이때의 어떤 존재가 구체적인 인간이나 명령자를 지칭하는 것이 아님은 분 명할 것이다. 괴롭지만 기꺼운 수행, 자임自任한 그 고통이 세계고世界苦의 한 편린임을 의심치 않는 신 념을 소유한 자의 그 수행 속에 이웃의 눈물이, 잘못 지나와버린 인류의 돌이킬 수 없는 후회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연민이 한데 만나 다독거리는 슬픈 연대의 지평 속으로 퍼져나가는 것. 예술은 그런 존 재의 대리인일 것이다. 이것은 예술이 신화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어야 하는 본성을 상기해야하는 이유기 도 하다. 어찌하든 예술은 미래(형)이기 때문이다.
미래, 필자가 궁금해 하는 건 그 미래다. 이 미래는 그의 <또 다른 세상>에서는 다소 모호한 가능태로서 이긴 하나, 또한 <건너가는 아이들>에서는 힘있는 과거가 됨으로써 미래를 선취하는 바가 있었다는 점에 서 의미있는 진전을 얻어냈다. 그것은 다른 작품들에 비해 확실히 공간적 과거 안에서 그저 암시로서나 ‘함유’하고 있으리라고 가정된 미래는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세기 당대의 가장 아픈 환부(患部) 중의 하나라는 점에서, 또한 미숙아들(아이, 동물)이 정상인-구체적 인간을 훌륭히 의인화하 고 있다는 점에서, 혹은 화면 내 형상들의 배치가 중력이 엄연히 작용하고 있는 물리학적 현실계 공간에 필적한다는 점에서 이 ‘현재’를 당당히 ‘미래’로 보아낼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곳에 인간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이 시대 문명의 변종 허위와 맞설 기호학적 무기, ‘비인간학의 불 모지’를 개간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언뜻 포착되기 때문이다.